대전의 산성 지정문화재 현황 : 24곳 (국가 사적 1곳 : 계족산성, 대전시 기념물 : 23곳) 대전을 산성의 도시라고 합니다. 기존에 알려진 산성은 40여 곳 이었으나 대전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에서는 2009년-2010년에 10여 곳 이상의 산성을 추가로 확인하였습니다. 그래서 대전은 50여 곳 이상의 산성을 보유하고 있는 도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먼저 문화재로 지정된 산성을 간략하게 안내하는 글을 게시합니다. 산성을 안내하는 글은 문화재청 자료를 사용하였고, 2009년 문화유산위원회의 조사 내용을 반영하였습니다. 대전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에서는 대전의 지정문화재 24곳 산성에 대한 분류를 아래와 같이 분류된 순서대로 24곳에 대한 산성 안내 글을 게시합니다. 1. 식장 계족산계 산성 : 10곳 계현성, 백골산성, 삼정동산성, 갈현성, 능성, 고봉산성, 질현성, 견두산성, 계족산성, 이현동산성 2. 금강수계의 산성 : 4곳 마산동산성, 노고산성, 성치산성, 소문산성 3. 보문산계의 산성 : 3곳 비파산성, 보문산성, 사정성 4. 갑천수계의 산성 : 4곳 흑석동산성, 월평동산성, 구성동산성, 우술성 5. 계룡산계의 산성 : 3곳 성북동산성, 안산동산성, 적오산성 산성 안내 글 자료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문화재 검색 1. 계현성 산성명칭 | 계현성(鷄峴城) | 둘레 | 220m | 수량/면적 | 60,793㎡ | 현존높이 | 남벽 3.3m | 지정일/지정 | 1991.07.10 / 대전시기념물 제24호 | 건물지 | 남쪽 저지대, 북쪽 고대 | 시 대 | 삼국시대 | 문지 | 2곳. 남동쪽, 북쪽능선 상 | 주 소 | 대전 동구 삼괴동 산3-1 | 우물 | 없음 | 소 유 | 사유 | 기타시설 | |
1> 일반설명 대전광역시 동구 삼괴동 닭재 위의 북쪽 봉우리에 있는 산성으로, 성의 둘레는 220m이다.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져 있으나 남동쪽의 성벽 일부분은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곳에서 백제의 것으로 보여 지는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 등이 발견되어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안에는 남쪽 성벽 부분에 폭 6∼8m의 평평한 대지가 마련되어 있으며, 북쪽에는 장대로 보이는 시설이 있다. 남쪽 벽과 북쪽 벽에는 성문터가 보인다. 계현성은 충청남도 금산군 마전 방면의 추정리산성, 금성산성과 연결되어 있어 이곳에서 넘어오는 적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동으로는 성치산성, 서로는 소호동산성, 사정성, 보문산성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 2> 전문설명 대전시 동구 삼괴동 덕산마을에서 옥천군 군서면 사양리로 넘어가는 계현(닭재) 위의 북쪽 봉우리(325m)에 축조된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성벽의 서북쪽이 일부 남아 있는데, 자연석을 깨뜨려 높이 5.2m로 쌓았으며, 성의 네 모퉁이에 치성(雉城)·망대로 추정되는 높이 3.3m, 너비 6m의 돌출 부분이 있다. 남문·동문 터가 남아 있으며, 동문 터에서 닭재로 통하는 길이 나 있다. 성벽은 서쪽 성벽으로 꺾여 해발 320m의 능선 부분으로 올라가면서 쌓여 있다. 북쪽 성벽은 계속 동벽으로 이어지나 중간 부분부터 다시 해발 315m 지점에서 남벽과 만나고 있다. 축조방법은, 밑에서 1.8m까지는 약간씩 안쪽으로 오므리며 쌓다가 그 위 1.5m 정도는 거의 수직으로 쌓아 성벽의 단면이 규형(圭形)을 이루고 있다. 동북쪽 성벽 부분도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바깥 높이 4.2m, 안쪽 높이 0.8m, 성벽 아랫부분의 폭이 4.5m 정도이다. 성 안에는 남쪽 성벽 부분에 폭 6∼8m로 평탄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백제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토기·기와 조각이 채집되었다. 2. 백골산성 산성명칭 | 백골산성(白骨山城) | 둘레 | 약 400m | 수량/면적 | 4,343㎡ | 현존높이 | 남벽 1.6m | 지정일/지정 | 1991.07.10 / 대전시기념물 제22호 | 건물지 | | 시 대 | 삼국시대 | 문지 | 흔적 찾기 어려움 | 주 소 | 대전광역시 동구 신하동 산 13 | 우물 | 없음 | 소 유 | 사유 | 기타시설 | |
1> 일반설명 백골산성은 대전광역시 동구 신하동 해발 340m의 백골산 정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400m이다. 이 산성은 산의 정상부를 둘러쌓고 있는데, 이러한 형태를 테뫼식 산성이라 한다. 성벽은 가파른 지형에 쌓여진 까닭에 완전히 무너져 내린 부분이 많아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백골산성의 서쪽으로는 백제의 전략 거점인 계족산성이 있고, 동쪽으로는 신라의 유명한 관산성을 끼고 있어 백제가 신라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목을 지키는 초소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인공호수인 대청호가 버젓하게 자리를 잡고 있지만, 성이 축조될 당시만 해도 신라를 마주보고 금강이 흐르고 이어 육로와 수로를 지키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전문설명 이 산성은 대전관내의 산성으로는 유일하게 1차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는 금강너머에 위치하고 있는 백골산의 정상부(해발 340m)에 테뫼식으로 쌓은 석축산성(石築山城)이다. 백골산은 대단히 험한 산세를 갖추고 있는데 오르는 길은 신하동쪽에서 계곡을 따라 동북쪽으로 오르면 된다. 이 산성은 서쪽으로는 백제측의 전략적 거점인 계족산성(谿足山城)과 동쪽으로는 신라 측의 유명한 환산성(環山城)과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또한 백골산이라는 명칭에서도 시사하듯이 이 산성을 사이에 두고 삼국시대에 백제군과 신라군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성벽은 지형에 따라 축조되어 있는데 그 둘레는 약 400m 가량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석축성벽이 가파른 지형에 축조된 관계로 거의 무너져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원상을 확인하기가 힘들다. 3. 삼정동산성 산성명칭 | 삼정동산성(三丁洞山城) | 둘레 | 약 350m | 수량/면적 | 3,180㎡ | 현존높이 | 보 3.8m | 지정일/지정 | 1990.05.28 / 대전시기념물 제17호 | 건물지 | 서쪽 중앙 고대 | 시 대 | 삼국시대 | 문지 | 흔적 찾기 어려움 | 주 소 | 동구 판암동 산1 | 우물 | 없음 | 소 유 | 사유 | 기타시설 | 남북양쪽 능선상의 치와 남쪽 보루성 |
1> 일반설명 해발 240m의 산 정상에 테를 두르듯 돌을 쌓아 만든 백제시대 성이다. 성의 평면 모양은, 남북으로 긴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둘레가 약 350m인 작은 성(城)이다.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져 원래의 모습을 추정하기 어렵고, 남벽 일부에 안팎으로 돌을 쌓은 흔적이 남아 있다. 산 능선이 지나는 동북쪽과 서남쪽의 성벽에 있는 네모난 돌출부는 성의 취약지점에 설치되는 치성(雉城)으로 보여 지며, 서벽에 가까운 산 정상부에 건물터로 보이는 평탄한 곳이 있다. 성안에서는 백제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토기 조각이 출토(出土)되기도 한다. 산성에서 남동쪽으로 50m 거리에 돌로 쌓아 만든 원형 평면의 시설이 있는데 보로 추정된다. 옥천 쪽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2> 전문설명 성의 평면 모습은 남북으로 긴 타원형이다. 성벽은 거의 대부분 허물어져 원래의 모습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남벽에서 일부 협축(夾築)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곳에서의 성벽 폭은 5.2m였다. 산 능선이 지나고 있는 동북쪽과 서남쪽의 성벽에서 각기 4.5m×5.7m, 7m×4.3m 정도의 돌출부가 있는데, 성의 취약지점에 설치되는 치성<雉城>의 흔적으로 보여 진다. 또한 서쪽 성벽 가까운 곳의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산성은 옥천방면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기 위하여 쌓았다고 추정된다. 4. 갈현성 산성명칭 | 갈현성(葛峴城) | 둘레 | 약 350m | 수량/면적 | 9,752㎡ | 현존높이 | 동북벽 2m | 지정일/지정 | 1990.05.28 / 대전시기념물 제12호 | 건물지 | 성의 중앙 평탄지 | 시 대 | 삼국시대 | 문지 | 1곳. 남문 | 주 소 | 대전광역시 동구 용운동 산9 | 우물 | 없음 | 소 유 | 사유 | 기타시설 | 북쪽 고대에 저장시설 |
1> 일반설명 대전광역시 동구 용운동에 있는 이 산성은 해발 263m로 산 정상부에 만들었으며, 용운동에서 세천동으로 넘어가는‘갈고개’에 있다. 산 정상을 둘러쌓은 형태로 되어 있으며, 둘레는 약 350m이다. 높이 2m의 동쪽 성벽은 네모난 돌로 앞면을 맞추어 쌓았고, 서쪽 성벽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부분적으로만 쌓았다. 성의 평면 형태는 남북으로 긴 타원형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폭 4.8m의 남문터가 남아 있다. 정상부의 가운데에 움푹 파이고 군데군데 돌로 쌓은 듯한 흔적이 보이고 있는데, 이는 저장시설과 관련된 유적으로 짐작된다. 삼국시대의 토기와 기와 조각을 성 안에서 찾아볼 수 있어, 성을 쌓은 시기를 알 수 있게 해준다. 2> 전문설명 테뫼형 석축산성으로 남북 타원형으로 성 둘레는 약 350m이다. 서벽일부분을 제외하고 성벽의 형태가 잘 나타난다. 이는 지형이 비교적 완만하기 때문이다. 동쪽 성벽은 길게 70m 가량 남아 있고 1m정도의 내벽의 형태도 볼 수 있다. 문터는 남문 터가 남아 있는데 문 폭은 4.8m정도이다. 북쪽 정상부의 중앙에는 폭 4m 정도 되는 움푹 파인 흔적과 군데군데 돌로 쌓은 흔적이 보이고 있는데 이는 저장시설과 관련된 유적으로 짐작된다. 5. 능성 산성명칭 | 능성(陵城) | 둘레 | 300m | 수량/면적 | 7,165㎡ | 현존높이 | 동벽 1.8m | 지정일/지정 | 1990.05.28 / 대전시기념물 제11호 | 건물지 | | 시 대 | 삼국시대 | 문지 | 2곳. 동문, 남문 | 주 소 | 대전 동구 가양동 산 1-1 | 우물 | 없음 | 소 유 | 사유 | 기타시설 | 치성 |
1> 일반설명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에 있는 해발 310m인 ‘비름들고개’ 산 정상부에 돌로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성 둘레는 300m 정도이다. 성벽의 대부분은 무너져 내렸지만 너비 5.1m의 동문 터와 너비 3m의 남문 터가 있다. 동쪽 성벽과 남쪽 성벽이 직각으로 만나는 부분에 성벽이 바깥쪽으로 튀어나오도록 쌓은 치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동문 터 남쪽에 있는 치성은 성벽 높이가 3.7m로 자연 경사면을 따라 처음 1m 가량은 수직으로 쌓다가 급히 안쪽으로 경사를 주어 오므려 쌓은 후, 다시 수직으로 쌓았다. 성벽은 앞부분을 약간 다듬은 돌을 사용하였는데, 이 부분의 치성은 밖으로 5m 가량 튀어나오게 쌓았고 너비는 5.5m이다. 성안에는 별다른 시설물은 남아있지 않으나, 곳곳에서 삼국시대의 토기편이 발견되고 있다. 동쪽 성벽부분에 남아있는 치성을 통하여 동쪽 방면에 대한 방어를 하기 위해 이 성을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2> 전문설명 가양동·자양동에서 비룡동 비름들 마을로 넘어가는 "비름들고개" 위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310m의 산 정상부에 축조된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성 둘레는 300m 가량이다. 성벽의 대부분은 무너져 내려 원래의 모습을 파악하기 힘들다. 문터는 동문터와 남문 터가 있고, 동문 터는 폭 5.1m, 성벽의 두께 3.4m이고, 남문 터는 폭 3m, 성벽의 두께 5.3m가량이다. 한편 동쪽 성벽과 남쪽 성벽에는 성벽이 직각으로 만나는 부분에 치성(雉成)으로 볼 수 있는 흔적이 남아 있어 주목된다. 특히 동문 터 남쪽에 남아 있는 치성은 성벽 높이가 3.7m 가까이 남아 있어 성의 축조방법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암반 위의 자연경사면을 따라 처음 1m 가량은 수직으로 쌓다가 급히 안쪽으로 경사를 주어 오므려 쌓은 후 다시 수직으로 쌓았다. 성돌은 앞부분을 약간 가공한 네모난 돌을 사용하였으며, 이 부분의 치성은 밖으로 5m 가량 내어 쌓았는데 그 폭은 5.5m이다. 이러한 형태의 치성은 동문 터 북쪽에서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성안에서 별다른 시설물은 찾아볼 수 없으나, 성내 곳곳에서 삼국시대의 토기 편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산성을 쌓은 목적은 동쪽 성벽부분에 남아 있는 치성의 흔적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듯이 동쪽 방면에 대한 방어를 위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6. 고봉산성 산성명칭 | 고봉산성(古鳳山城) | 둘레 | 약 250m | 수량/면적 | 151,604㎡ | 현존높이 | 서벽 1.1m | 지정일/지정 | 1991.7.10 / 대전시기념물 제21호 | 건물지 | | 시 대 | 삼국시대 | 문지 | 흔적 찾기 어려움 | 주 소 | 대전 동구 주산동 산 19-1 | 우물 | 없음 | 소 유 | 국유 | 기타시설 | |
1> 일반설명 대전광역시 동구 주산동 해발 340m의 고봉산에 있는 고봉산성은 돌로 쌓은 산성으로, 그 둘레는 약 250m이다. 이 산성은 산의 정상부를 둘러쌓고 있는데, 이러한 형태를 테뫼식 산성이라 한다. 산성은 동쪽으로 길게 산의 형세를 따라 타원형의 평면 형태를 하고 있다. 서쪽 벽면에 3단 정도의 석축이 남아 있을 뿐 성벽은 거의 허물어져 윤곽만을 확인할 수 있다. 약 300m 떨어진 곳에 질현성이 있어, 질현성의 자성(子城)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고봉산성은 질티고개를 두고 질현성과 나란히 있어 이 고개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쌓아졌다고 추측하고 있다. 2> 전문설명 질현성에서 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해발 304m의 고봉산이 있고, 성은 이 산의 정상부에 축조되어 있다. 테뫼식 석축산성인데 성 둘레는 약 250m이다. 산성의 평면형태는 타원형이며, 성벽은 거의 허물어져 윤곽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서벽에서 3단 정도의 석축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산성은 남쪽의 질티재가 잘 보이는 지점으로서, 이 고개로 통행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조되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질현성과 인접하여 있는 것은 이 산성이 질현성의 자성(子城)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7. 질현성 산성명칭 | 질현성(迭峴城) | 둘레 | 800m | 수량/면적 | 11,107㎡ | 현존높이 | 동북벽 4.2m | 지정일/지정 | 1989.03.18 / 대전시기념물 제8호 | 건물지 | 남쪽 평탄지 | 시 대 | 삼국시대 | 문지 | 3곳. 동문, 서문, 남문 | 주 소 | 대전 대덕구 비래동 산 31-1 | 우물 | 우물 매몰됨 | 소 유 | 사유 | 기타시설 | |
1> 일반설명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에 있는 질현성은 질티고개 북쪽 정상의 산세를 이용하여 돌과 흙을 섞어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800m이다. 모서리를 다듬은 사각형의 돌로 성벽을 쌓았는데, 아래에서부터 약간씩 안으로 들여쌓았고, 군데군데에는 조그만 돌을 끼워 넣었다. 동·서·남벽 3곳에 문터가 남아있는데, 이중 남문 터는 너비 3.8m로, 성으로 드나드는 가장 중요한 통로로 이용되었다. 남문 터 주변에 특별한 시설은 없지만 10m 정도의 땅에 항상 습기가 많은 것으로 보아, 전에 연못이 있었던 자리로 생각된다. 성 안에서 백제, 신라의 토기조각과 조선시대 자기조각이 출토되어 이 성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해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을 중심으로 북쪽 능선에는 6개의 작은 성이 있는데, 이것은 질현성을 보완하기 위해 쌓아진 것으로 보인다. 학계에서는 이 성을 백제부흥운동군의 거점중의 하나였던 지라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2> 전문설명 이 산성은 가양동 더퍼리에서 동구 추동으로 넘어가는 "질티재" 북쪽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성 둘레는 800m 정도이며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성을 쌓은 수법은 내탁(內托)이나, 동벽의 일부에서는 협축(夾築)한 곳도 있다. 협축한 부분의 성벽 안쪽 높이는 1.5m이고, 바깥쪽은 3∼4m에 달한다. 성벽을 쌓은 돌은 모서리를 가공한 네모난 돌로 면을 맞추어 아래에서부터 약간씩 안으로 들여쌓으면서 군데군데 조그만 돌로서 쐐기를 박은 흔적도 볼 수 있다. 문터의 흔적은 동·서·남벽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남문터는 성으로 드나드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다. 문 폭은 3.8m 정도이다. 이 남문터의 동쪽 200m되는 곳에 수구(水口)로 생각되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는 특별한 시설은 남아 있지 않으나 주변 10m정도가 항상 습기가 많다. 아마도 성내에서 흘러드는 물의 속도를 줄여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못을 팠던 자리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동문터는 추동으로 연결되는 통로였고, 서문터는 가양동으로 가는 길이 있으며, 문폭은 3.5m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질현성은 백제부흥운동군의 거점중의 하나였던 지라성(支羅城) 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성을 중심으로 북쪽 능선상의 6개의 성보(城堡)는 이 성을 보완할 목적으로 쌓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8. 견두산성 산성명칭 | 견두산성(犬頭山城) | 둘레 | 280m | 수량/면적 | 185,058㎡ | 현존높이 | 서쪽 장대지 동벽 1.2m | 지정일/지정 | 1991.07.10 / 대전시기념물 제20호 | 건물지 | | 시 대 | 삼국시대 | 문지 | 흔적 찾기 어려움 | 주 소 | 대전 동구 효평동 산83 | 우물 | 없음 | 소 유 | 국유 | 기타시설 | |
1> 일반설명 계족산성에서 동남쪽으로 1.3㎞ 떨어져 있는 해발 363m의 개머리산 또는 견두산의 꼭대기를 빙둘러 쌓은 산성으로, 성의 둘레는 280m 정도이다. 성벽은 자연 암반을 이용하면서 자연석으로 쌓았는데, 남벽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성벽의 대부분이 무너져 내린 상태라 현재는 그 윤곽만을 확인할 수 있다. 성의 동쪽부분에는 지름 6m 정도를 높게 만들어 놓았는데, 지휘자가 망을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장대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산성의 바로 밑으로는 신탄진-옥천 간의 도로가 동쪽과 북쪽의 띠를 두른 듯 휘감고 지나고 있으며, 성의 동쪽으로는 대청호가 내려다 보인다. 이렇듯 이 산성은 도로와 수로를 감시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계족산성의 아들 격인 자성(子城)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2> 전문설명 계족산성에서 동남쪽으로 1.3km 떨어져 있는 해발 363m인 개머리산에 테뫼식으로 쌓은 성이다. 성 둘레는 280m정도로 자연암반을 이용하면서 잡석(雜石)으로 구축하였는데, 남벽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성벽의 대부분이 무너져 내려 현재는 그 윤곽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성의 동쪽 부분에는 지름 6m 정도를 높게 만들어 놓았는데, 이곳에 장대(將臺)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산성 바로 밑으로 신탄진-옥천간의 도로가 동쪽과 북쪽의 띠를 두르듯 휘감고 지나가고 있다. 또한 성의 동쪽으로는 대청호가 내려다 보인다. 이 산성은 이러한 도로와 수로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조된 계족산성의 자성(子城)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9. 계족산성 산성명칭 | 계족산성(鷄足山城) | 둘레 | 1,037m | 수량/면적 | 51,984㎡ | 현존높이 | 외벽 7m, 내벽 3.4m | 지정일/지정 | 1991.10.25 / 국가사적 제355호 | 건물지 | 북쪽 성의 입구 쪽에 있음 | 시 대 | 삼국시대 | 문지 | 3곳, 동문, 서문, 남문 | 주 소 | 대전 대덕구 장동 산85외 10필지 | 우물 | 동문지 부근 저수지 있음 | 소 유 | 국유 | 기타시설 | 봉화대 |
1> 일반설명 계족산록의 (해발 420m) 정상부에 테를 두르듯 돌을 쌓아 만든 삼국시대 산성으로 성 둘레가 1,037m인 이 고장 최대의 산성이다. 성벽은 대부분 흙을 깎아내고 바깥쪽에만 돌을 쌓는 수법으로 만들었으나 동벽 일부는 안팎으로 모두 돌을 쌓고 내부를 흙으로 채우는 수법을 사용했다. 문터는 급경사 지역인 북벽을 제외한 남벽, 서벽, 동벽에 각각 한 곳씩 남아 있다. 성내 시설로는 남문 터 부근에서 봉수대(烽燧臺)터, 동벽 쪽 낮은 지대에서 우물과 저수지가 각각 확인되었다. 그 외에 장수의 지휘소로 사용하던 장대지(將臺址)를 포함하여 10여 개의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이 산성은 백제부흥군이 활동했던 옹산성(甕山城)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2> 전문설명 대전시 장동 계족산(해발420m)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축조된 테뫼식 산성이다. 이 산성은 백제가 쌓은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1998∼99년 발굴을 통해 신라에서 쌓은 것으로 밝혀졌다. 산성의 높이는 약 7∼10m 가량 되며, 동·서·남쪽에 문터를 만들었다. 성 안에서 삼국시대에 만든 큰 우물터가 발견되었고, 성내 건물터에서는 고려시대 기와편과 조선시대 자기편이 발견되어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쌓기 방법은 보은에 있는 신라 삼년산성(사적 제235호)과 같은 방식으로 쌓았다는 것이 발굴을 통해 밝혀졌고, 출토된 토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이 6세기 중·후반의 신라토기임이 밝혀졌다. 이후에 나온 토기 형태도 백제계는 소수이며 다수의 신라계 토기가 보여, 한때 백제가 점령하긴 했지만 신라에 의해 만들어진 산성으로 조사되었다. 계족산성은 새로운 발굴 성과에 의해 신라가 쌓은 것으로 나타났으나 아직도 논란이 있으며, 6세기 중·후반 신라나 백제에 의해 만들어진 산성으로, 당시 대전지방이 가진 전략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10. 이현동산성 산성명칭 | 이현동산성(梨峴洞山城) | 둘레 | 300m | 수량/면적 | 7,500㎡ | 현존높이 | 서벽 1.1m | 지정일/지정 | 1993.06.21 / 대전시기념물 제31호 | 건물지 | | 시 대 | 삼국시대 | 문지 | 흔적 찾기 어려움 | 주 소 | 대전 대덕구 이현동 산38 | 우물 | 없음 | 소 유 | 사유 | 기타시설 | |
1> 일반설명 계족산성에서 북쪽으로 약 1.3km 떨어진 곳에 있는 이 산성은 남북방향의 봉우리 두 개를 중심으로 말안장 모양의 평면형으로 축조되었다. 성은 둘레가 300m이고, 테뫼식 석축산성으로서 내탁외축<內托外築>하였는데, 성벽의 대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남벽의 일부에서 높이 1.2m의 성벽이 남아 있고, 이곳에서의 성벽 축조는 계족산성의 성돌과 유사한 편암계<片岩系>의 돌을 가지고 쌓았는데, 성벽을 약간씩 안쪽으로 물려서 쌓았으나 축조방법은 조잡하다. 북벽의 통과지점은 능선의 경사도가 완만하기 때문에 석루<石壘>를 높게 쌓았다. 성안의 남쪽 봉우리에 크기 5m×6m, 깊이 80㎝, 북쪽 봉우리에 크기 4m×5m, 깊이 80㎝정도의 구덩이가 있다. 이는 저장시설 또는 봉수시설로 짐작된다. 11. 마산동산성 산성명칭 | 마산동산성(馬山洞山城) | 둘레 | 200m | 수량/면적 | 2,281㎡ | 현존높이 | 남벽 8단 1.5m | 지정일/지정 | 1993.06.21 / 대전시기념물 제30호 | 건물지 | 남서쪽 추정 | 시 대 | 삼국시대 | 문지 | 흔적 찾기 어려움 | 주 소 | 대전 동구 마산동 산6 | 우물 | 없음 | 소 유 | 국유 | 기타시설 | |
1> 일반설명 대전광역시 동구 마산동에 있는 산성으로, 해발 220m의 산꼭대기를 빙둘러 돌로 쌓아올렸다. 성벽의 둘레는 200m 정도이며, 거의 무너져 내려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고 다만 남쪽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다. 산의 경사면을 깎아내리고 바깥쪽은 돌을 쌓고 안쪽에는 흙을 채워 성벽을 쌓아 올렸다. 따라서 성벽의 안쪽 부분은 평탄한 지형을 이루게 되어 방공호와 같은 통로를 만들었는데, 남쪽과 북쪽의 성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북쪽 성벽의 한층 높은 곳에는 전쟁이 있을 때 장수가 올라서서 지휘를 하던 곳인 장대터 시설이 폭 4m, 높이 2m 정도로 남아있다. 서남쪽 성벽의 모서리 부분에도 이와 비슷한 무너진 시설이 있는데, 이것은 서남쪽으로 발달된 능선 부근에 해당되어 취약점을 보강하기 위한 시설로 추정된다. 서북 방향으로 노고성, 서남쪽으로 이 지역의 전략적 거점인 계족산성과 연결되어 있다. 백제 때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전문설명 추동 말미마을의 동쪽에 회덕황씨 재실이 있고,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접하여 있는 해발 220m의 산 정상부에 축조되어 있는 테뫼식 석축산성이 마산동 산성이다. 성 둘레는 200m이며, 성벽은 무너져 내려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남쪽 성벽 일부에서 석축을 유지하고 있는 부분이 있을 뿐이다. 이곳에서 관찰된 성벽의 축조방법은 성돌을 약간씩 안쪽으로 물려 쌓았고, 현재 9단 140㎝정도가 남아 있다. 동북쪽 성벽의 한층 높은 부분에는 무너진 석축 시설이 있는데 폭 4m, 높이 2m정도이다. 장대 시설로 추측된다. 또한 서남쪽 성벽의 모서리 부분에도 이와 비슷한 무너진 석축시설이 있다. 이는 서남쪽으로 발달된 능선부에 해당되고 있어, 취약지점을 보강하기 위한 시설로 이해된다. 이 산성은 서북방향으로 노고성과, 서남쪽으로는 계족산성과 연결되고 있다. 12. 노고산성 산성명칭 | 노고산성(老姑山城) | 둘레 | 300m | 수량/면적 | 17,554㎡ | 현존높이 | 서벽 12-15단 약 2.5m | 지정일/지정 | 1991.7.10 / 대전시기념물 제19호 | 건물지 | 없음 | 시 대 | 삼국시대 | 문지 | 1곳. 남문 | 주 소 | 대전 동구 직동 산 43 | 우물 | 없음 | 소 유 | 사유 | 기타시설 | |
1> 일반설명 대전광역시 동구 직동 피골마을의 뒷산인 해발 250m의 산 정상에 자리한 산성으로, 산꼭대기를 빙 둘러 쌓았다. 성의 둘레는 300m 정도로 남북으로 긴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성 안의 면적은 좁은 편이다. 성벽의 대부분이 허물어져 그 윤곽선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며,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지었다. 남쪽 성벽의 일부분은 거친 성돌을 사용하여 조잡하게 성벽을 쌓았다. 남쪽 성벽 한 곳에서 폭 2.3m의 문터가 발견되었다. 산성에서 남서쪽으로 계족산성과 바로 연결되어 있고, 동쪽으로는 대청호가 내려보인다. 계족산성의 전초기지로 금강의 수로와 옥천-문의간 도로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성이다. 2> 전문설명 이 산성은 피골마을의 뒷산인 해발 250m의 산 정상에 위치한다. 성 둘레는 300m 정도로 남북으로 긴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또한 산 정상부분에 테뫼식으로 축조하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성 내부 면적은 좁다. 성벽의 대부분이 허물어져 그 윤곽선만 확인할 수 있으나,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였고, 남벽의 일부는 거친 성돌을 사용하여 조잡하게 성벽을 쌓았다. 이 산성에서 남서쪽으로는 계족산성과 바로 연결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대청호가 내려다보이고, 동쪽으로는 옥천-문의간 도로가 내려다보인다. 문터는 남벽에서만 한 곳이 확인될 뿐이며, 그 폭은 2.3m이다. 이 산성은 계족산성의 전초기지로서 금강의 수로(水路)와 옥천-문의간 도로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13. 성치산성 산성명칭 | 성치산성(城峙山城) | 둘레 | 160m | 수량/면적 | 1,091㎡ | 현존높이 | 동벽 17단 2.3m | 지정일/지정 | 1993.06.21 / 대전시기념물 제29호 | 건물지 | 확인 어려움 | 시 대 | 삼국시대 | 문지 | 1곳. 남문 | 주 소 | 대전 동구 직동 산 4 | 우물 | 없음 | 소 유 | 국유 | 기타시설 | |
1> 일반설명 계족산성에서 북동쪽으로 약 6㎞ 지점의 성치산 정상을 빙 둘러 쌓은 산성으로, 평면 형태는 긴 타원형이다. 성벽의 둘레는 160m 정도이고, 폭은 4.3m인데, 거의 허물어져 원래의 모습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현재 동북쪽 성벽에서 남쪽 성벽에 이르는 부분에만 일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성벽은 겹으로 쌓았는데 바깥 성벽의 높이는 2.4m이고, 안쪽에는 1∼2단의 석축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성벽은 반듯하고 납작한 돌의 앞면을 맞추어 가로 쌓기를 하였다. 현재 남문터가 남아 있는데 폭은 3m 정도이다. 성 안의 중심부에는 한 단 정도 높은 작은 봉우리가 솟아있는데, 장수가 높은 곳에서 지휘하던 장대터인 것으로 보인다. 봉우리 중앙에 지름 6.2m 가량 움푹 들어간 곳이 보이는데, 봉수대 혹은 저장시설이었던 듯하다. 2> 전문설명 계족산성에서 북동쪽 6km 떨어진 곳 해발 210m의 성치산 정상부에 있는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산성의 평면 형태는 긴 타원형의 모습인데 성 둘레는 160m에 불과하다. 성벽은 대체로 해발 210m의 등고선을 따라 축조되었으며, 거의 다 허물어져 원래의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다. 특히 서쪽 성벽부분은 완전히 붕괴되어 성벽의 통과선만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동북쪽 성벽에서 남쪽성벽에 이르는 부분은 일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축조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성의 축조방법은 내외협축(內外夾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바깥성벽의 높이는 2.4m이고, 안쪽에는 1∼2단의 석축이 확인되며, 성벽의 폭은 4.3m였다. 성벽은 반듯하고 납작한 돌의 앞면을 맞추어 가로 쌓기로 축조하였고, 돌의 크기는 50㎝×20㎝내외이다. 성안의 시설물로는 남문터가 남아 있다. 즉 서남쪽의 능선을 방어하기 위하여 석루(石壘)를 높게 쌓고 그 옆으로 3m 폭의 문을 만들었다. 한편 성안의 중심부에는 한단 높은 작은 봉우리가 형성되어 있다. 이는 장대가 있었던 흔적으로 생각되며, 봉우리 중앙에 지름 6.2m 가량 움푹 들어간 시설이 있는데, 이는 봉수나 저장시설로 생각된다. 14. 소문산성 산성명칭 | 소문산성(蘇文山城) | 둘레 | 350m | 수량/면적 | 46,513㎡ | 현존높이 | 동북벽 4-5단 1m | 지정일/지정 | 1991.07.10 / 대전시기념물 제23호 | 건물지 | 장대지 부근으로 추정 | 시 대 | 삼국시대 | 문지 | 2곳. 남문, 동문 | 주 소 | 대전 유성구 신동 산13 | 우물 | 동벽부근 1곳 추정 | 소 유 | 국유 | 기타시설 | |
1> 일반설명 대전광역시 유성구 신동 녹골마을의 북쪽 해발 200m의 산정상부에 있는 산성으로, 성벽의 둘레는 350m이다. 이 산성은 산 정상을 둘러쌓고 있는데, 이러한 형태를 테뫼식 산성이라 한다. 산은 거의 평탄한 지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성의 평면은 거의 원형에 가깝다. 테뫼식 산성 중에서는 비교적 작은 규모에 속하는 이 산성은 성벽이 통과하는 지점은 안쪽에 5∼10m의 평탄한 지형이 있고, 성벽 바깥 높이는 5m 내외로 추정된다. 동쪽 벽과 남쪽 벽의 허물어진 곳을 보면 1∼4단의 석축 아래가 순수한 흙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원래의 성벽은 흙으로 쌓은 토축이고 후대에 돌로 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폭 4m의 남문터와 폭 3m의 동문터가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건물터를 찾아보기 어렵고, 다만 동쪽벽 가까운 곳에 지름 3m의 우물터가 한 곳 있다. 2> 전문설명 소문성은 신동의 녹골마을 북쪽 해발 200m의 산 정상부에 위치하며, 성의 평면형은 거의 원형에 가깝고 성 둘레 350m로서 테뫼식 산성 중에서 비교적 작은 규모에 속한다. 성벽이 통과하는 지점은 안쪽에 5∼10m의 평탄한 지형이 있고, 성벽 바깥높이는 5m 내외로 추정된다. 성벽 윗부분에는 성돌이 일부 노출되어 있어, 외견상으로 석축에 의한 축성법을 이용하였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동벽과 남벽의 허물어진 곳에서 확인된 바로는 1∼4단의 석축 아래가 순수한 토축(土築)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의 성벽은 토축이고, 후대에 석축시설이 추가된 것으로 생각된다. 문터는 2개소가 있고, 남문터의 폭은 약 4m, 동문터의 폭은 약 3m 내외이다. 성안에는 건물터를 찾아보기 어렵고, 다만 동벽 가까운 곳에 지름 3m의 우물이 하나 있다. 15. 비파산성 산성명칭 | 비파산성(琵琶山城) | 둘레 | 350m | 수량/면적 | 1,686㎡ | 현존높이 | 서벽 5단 1.2m | 지정일/지정 | 1991.07.10 / 대전시기념물 제25호 | 건물지 | 북쪽 고대평탄지, 남쪽 저지대 평탄지 추정 | 시 대 | 삼국시대 | 문지 | 1곳. 남문 | 주 소 |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산18 | 우물 | 없음 | 소 유 | 국유 | 기타시설 | 북쪽 고대부근 저장고 |
1> 일반설명 비파산성은 대전광역시 동구 소호동에 있는 산성으로 소호동산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예전에 소호동과 대별동을 넘나드는 고개를 ‘비파치’라 불렀는데, 고개 이름을 따서 비파산성이라 불렀다. 자연석을 이용하여 산꼭대기를 빙 둘러 쌓은 산성으로 현재는 거의 대부분이 붕괴되어 원형을 찾아볼 수 없다. 성을 쌓은 방법도 알 수 없으며, 다만 문의 넓이가 2.2m가 되는 남문 터만 확인할 수 있다. 성 안의 평평한 곳에서는 백제의 것으로 보이는 평행선무늬를 새긴 토기 조각과 줄무늬, 격자무늬가 있는 기와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비파산성은 보문산성과 직접 연결되고 있으며, 대전의 동쪽에 있는 능성, 삼정동 산성과도 마주하고 있다. 이 산성은 대전에서 마전, 금산 방면으로 통하는 길을 막기 위해서 쌓은 것으로 보인다. 2> 전문설명 이 산성은 테뫼식 석축산성(石築山城)으로 성의 둘레는 약 350m이다. 성벽은 화강암계통의 자연할석을 이용하여 내탁(內托)하여 외축(外築)하였는데 대부분이 붕괴되어 그 윤곽선만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이다. 다만 남벽에서 40㎝x30㎝, 40㎝x18㎝, 22㎝x20㎝ 크기의 석재로 5단 정도의 석축이 남아 있는데 그 높이는 1.1m이었으며, 복원하면 5.6m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벽내 중앙에는 원형으로 이루어진 직경 3.5m의 함몰된 부분이 있는데 봉수시설(烽燧施設)로 추측된다. 이 봉수지(烽燧址) 바로 남쪽으로 17.5mx11.4m 규모의 평평한 고대가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는 민묘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부근에서는 평행선문(平行線文)의 토기편(土器片)과 선조문(線條文) 및 격자문(格子文)의 와편(瓦片)들이 수습되어 건물지로 추정된다. 16. 보문산성 산성명칭 | 보문산성(寶文山城) | 둘레 | 300m | 수량/면적 | 7,180㎡ | 현존높이 | 서남벽 16단 3.42m | 지정일/지정 | 1990.05.28 / 대전시기념물 제10호 | 건물지 | 북쪽 평탄지 | 시 대 | 삼국시대 | 문지 | 2곳. 서문, 남문 | 주 소 | 대전광역시 중구 대사동 산 3-45 | 우물 | 없음. | 소 유 | 국유 | 기타시설 | 장대루 |
1> 일반설명 대전광역시 중구 대사동 보문산정상 시루봉에서 동쪽 지류봉(406m) 정상 부분의 산세를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둘레는 300m이다. 성벽은 자연지형에 따라 간단하게 다듬은 네모난 돌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성벽 바깥 면은 조금씩 안쪽으로 둘러쌓아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다. 암반으로 형성된 동쪽과 북쪽의 급경사면에는 별도로 성벽을 쌓지 않았다. 발굴조사 결과 남문 터가 확인되었고, 현재 통행로로 사용되는 북문을 통해 고려시대에는 성문 폭을 좁혀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동쪽 성벽 아래에서는 청동기시대 후기의 주거지 유적과 민무늬토기, 덧띠무늬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이 성은 백제 말에 신라와의 전투가 치열하던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인근에 있는 산성들과 쉽게 연락을 취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2> 전문설명 이 성은 백제 말에 신라와의 전투가 치열하던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인근에 있는 산성들과 쉽게 연락을 취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산성은 대전광역시의 복원, 정비 계획에 따라 1990년 3월 12일부터 4월 20일까지 윤무병(尹武炳)교수를 비롯한 조사단에 의하여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이를 토대로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 산성의 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장대지(將臺址)에서는 계족산(谿足山)-식장산(食藏山)을 연결하는 산 능선 상에 위치하고 있는 제 산성들과 서로 연결되고 있어 전략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17. 사정성 산성명칭 | 사정성 | 둘레 | 약 350m | 수량/면적 | 6,000㎡ | 현존높이 | 면석이 남아있는 성벽 없음 | 지정일/지정 | 1990.05.28 / 대전시기념물 제14호 | 건물지 | 동남쪽 고지대의 평지 | 시 대 | 삼국시대 | 문지 | 흔적 찾기 어려움 | 주 소 | 대전 중구 사정동 산62 | 우물 | 없음 | 소 유 | 사유 | 기타시설 | |
1> 일반설명 사정성은 대전에서 진산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기 위하여 쌓았던 것으로 보이며, 남쪽으로 흑석동산성, 북쪽으로는 월평동산성과 연결되어 있고, 대전 동쪽의 산성들과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대전광역시 중구 보문산 사정공원 입구의 서쪽 해발 160m의 산 위에 위치한 산성으로, 산꼭대기를 빙 둘러 돌로 쌓아올렸다. 성벽의 둘레는 약 350m였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전부 허물어진 상태여서 현재는 그 윤곽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성의 안쪽은 서쪽으로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동남쪽 높은 곳에 건물터가 남아 있다. 2> 전문설명 대전 동물원에서 서쪽 1km 지점의 해발 160m의 산 정상에 위치한 둘레 350m의 백제시대의 퇴뫼식 석성이다. 대부분의 성벽은 허물어져 있고 윤곽 만 알 수 있는 정도이다. 성 안은 서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동남쪽 고지대에서 평지가 보이는데 주변에서 백제시대의 와편. 토기편이 발견 되는 것으로 보아 건물지로 추정된다. 이 산성은 대전에서 남쪽인 진산 방면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기 위해 쌓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남쪽으로 흑석동 산성, 북쪽으로 월평동 산성, 동쪽으로 보문 산성, 삼정동 산성과 연결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이 산성은 삼국사기에 사정책에 관한 기록이 있어 과거와 현제의 지명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산성이기도 하다. 사정성을 찾아가는 길은 산성동 사거리에서 침산동 방향으로 가다보면 대전 동물원 삼거리가 나오는데, 삼거리에서 우측방향인 관음사 쪽으로 가서, 관음사 주차장의 우측 야산에 사정성이 위치한다. 18. 흑석동산성 산성명칭 | 흑석동산성(黑石洞山城) | 둘레 | 470m | 수량/면적 | 23,210㎡ | 현존높이 | 거의 허물어짐 | 지정일/지정 | 1990.05.28 / 대전시기념물 제15호 | 건물지 | 동벽 부근 추정 | 시 대 | 삼국시대 | 문지 | 1곳, 남문 | 주 소 | 대전 서구 봉곡동 산26-1 | 우물 | 없음 | 소 유 | 국유 | 기타시설 | |
1> 일반설명 대전광역시 서구에 봉곡동 해발 197m의 고무래봉 정상에 있는 산성이다. 백제 때 산성으로 산봉우리를 둘러 쌓은 형태이며, 둘레는 470m에 달한다. 성벽은 자연석을 이용하였으며, 바깥쪽 벽만 돌로 쌓고 안쪽은 흙과 잡석을 채우는 방법으로 만들었다. 남벽은 해발 185m의 능선에 만들었고, 문터는 남문터만이 남아 있는데 그 폭은 2.8m 정도이다. 남벽은 서쪽 성벽 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조금 올라온 뒤 꺾여져 북쪽 성벽으로 이어진다. 북쪽 성벽은 거의 일직선으로 올라가 정상까지 이르렀으며, 여기서 수직으로 꺾여져 이루어진 동쪽 성벽은 가파르게 내려와 남쪽성벽과 접하고 있다. 북쪽 성벽을 제외한 나머지의 안쪽에는 평탄한 지형이 있어 건물터였다고 여겨진다. 이곳에서 백제의 뚜껑접시(개배)를 비롯한 많은 토기편들이 흩어져 있고, 기와편들도 쉽게 발견할 수 있어 성의 사용시기를 알 수 있다. 이 산성은 남쪽을 제외한 3면이 갑천으로 둘러져 있고, 경사면이 급해서 대전에서 연산에 이르는 길목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쌓여졌다고 짐작된다. 2> 전문설명 흑석동역의 서쪽에 있는 해발 197m의 고무래봉 정상부에 축조된 산성으로, 성둘레가 470m에 달하는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성벽은 거의 붕괴되었으나 윤곽은 뚜렷이 남아 있다. 남벽은 해발 185m의 능선상에 축조되었는데, 서쪽 성벽쪽으로 점차 내려가 해발 175m부분까지 내려가다가 다시 올라가 해발 180m부분에 이르러 꺾어져 북쪽 성벽을 구축하였다. 북쪽 성벽은 거의 일직선으로 올라가 해발 195m의 정상까지 이르렀으며, 여기서 거의 수직으로 꺾여져 이루어진 동쪽 성벽은 해발 185m 부분까지 내려와 남쪽 성벽과 접하고 있다. 북쪽 성벽을 제외한 나머지 성벽의 안쪽에는 폭 6∼9m 가량의 평탄한 지형이 있어 건물터였다고 생각되어진다. 이곳에서 백제시대의 뚜껑접시를 비롯한 많은 토기편들이 흩어져 있고, 기와편들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성벽은 자연석으로 쌓았는데, 거의 붕괴되었지만 동쪽 성벽에서 윗부분의 폭이 5.2m임을 확인할 수 있다. 문터는 남문터만 남아 있고 그 폭은 2.8m 정도이다. 이 산성은 남쪽을 제외한 주변이 하천으로 둘러져 있어 대전에서 연산에 이르는 길목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쌓여졌다고 짐작된다. 19. 월평동산성 산성명칭 | 월평동산성(月坪洞山城) | 둘레 | 710m | 수량/면적 | 27,838㎡ | 현존높이 | 잔존 성벽이 거의 없음 | 지정일/지정 | 1989.3.18 / 대전시기념물 제7호 | 건물지 | 북쪽 평탄지 | 시 대 | 삼국시대 | 문지 | 3곳. 동문, 서문, 북문 | 주 소 | 대전 서구 월평동 산 12-2 | 우물 | 찾지 못함. | 소 유 | 사유 | 기타시설 | |
1> 일반설명 대전광역시 서구 월평동에 있는 해발 137.8m의 야산 정상부를 따라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성둘레는 약 710m이다. 성벽은 거의 붕괴되었지만 성을 쌓은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고, 산 능선을 따라 축조된 성벽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서벽의 일부에서는 바깥벽·안벽이 남아있다. 성문터는 동·서·북벽에 각각 한 곳씩 남아있는데, 동문 터의 너비는 5m이고, 서문 터는 너비 3.6m로 서벽의 중간 부분에 있다. 북문 터는 너비 3m로 성에서 가장 낮은 골짜기에 있는데, 부근에 매우 평탄한 곳이 있어 물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안에는 성벽을 따라 너비 7∼12m의 물길인 도랑이 있으며, 곳곳에는 평지가 많아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5년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했을 때 백제의 집 자리, 저장구덩이, 성벽, 말뚝을 박아 생긴 구덩이 등 유구가 확인되었다. 또한 세발토기(삼족토기), 그릇받침(기대), 기와, 말안장이 출토되어 월평동 산성의 사용시기와 성격을 알 수 있게 하였다. 2> 전문설명 월평동에 있는 해발 137.8m의 산 정상부를 따라 쌓은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으로 성 둘레는 약 710m이다. 성벽은 거의 붕괴되어 원래의 모습을 찾기 어려우나 흔적이 뚜렷하여 그 자취를 더듬어 보는데 크게 힘들지 않다. 산 능선을 따라 축조된 성벽은 자연석의 바깥면을 맞추어 쌓았으며, 서벽의 일부에서는 바깥벽 4.3m, 안벽 1m, 윗폭 2.2m가 남아있다. 문터는 동·서·북벽에 각각 한 곳씩 남아 있고, 동문터는 폭 5m로 갈마동으로 갈 수 있으며, 서문터는 폭 3.6m로 서벽의 중간부분에 위치한다. 한편 북문터는 이 성에서 가장 낮은 골짜기에 위치하는데, 성벽이 서로 약간 어긋나 있어 통행하려면 S자 모양으로 굽어 들어가야 한다. 폭은 3m이다. 또한 북문터 부근에는 매우 평탄한 곳이 있으며, 이곳에 수구(水口)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안에는 성벽을 따라 7m∼12m 너비로 내호(內壕)로 보이는 통로가 전체에 둘러져 있고, 성안의 곳곳에 평지가 많아 당시에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백제시대의 각종 토기편이 많이 발견된다. 한편 1995년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성의 남쪽 상수도 사업시설부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을 때, 백제시대의 집자리, 저장구덩이, 나무로 짠 저장시설, 성벽, 목책(木柵)구덩이 등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발굴조사에서 발견한 유물은 삼족토기(三足土器), 그릇받침, 기와, 말안장 등이 있고, 이러한 유물들은 월평동산성의 사용 시기 및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20. 구성동산성 산성명칭 | 구성동산성(九城洞山城) | 둘레 | 580m | 수량/면적 | 4,760㎡ | 현존높이 | | 지정일/지정 | 1989.03.18 / 대전시기념물 제6호 | 건물지 | | 시 대 | 삼국시대 | 문지 | 3곳. 북동쪽문지,남문,동문 | 주 소 | 대전 유성구 구성동 산 4-3 | 우물 | 찾기 어려움 | 소 유 | 국유 | 기타시설 | 내호시설 |
1> 일반설명 대전광역시 유성구 구성동에 있는 성두산 정상의 지세를 이용하여 산의 안팎을 적절히 깎아 급경사의 성벽을 이룬 산성으로, ‘거북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 거의 대부분이 붕괴되어 성의 윤곽선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성안에는 너비 8∼10m의 도랑이 둘러져 있는데, 이것은 성벽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산성은 성두산 정상부에 축조한 북성과 남으로 뻗은 산 능선을 따라 축조한 남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북쪽 성벽은 둘레 330m로 외부는 흙을 깎아내어 경사지게 하고, 내부는 평평하게 하였으며, 성의 동북부에는 문터가 있다. 남쪽 성벽은 둘레 250m로 넓은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좋은 곳이며, 문터는 북성과의 접합부에 2개가 있다. 산성이 있는 유성은 백제 때 노사지현(奴斯只縣)으로 알려져 있다. 2> 전문설명 이 산성은 대전지방 기상청 서쪽 해발 86.7m의 성두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거북성(龜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성벽의 축조는 삭토(削土)에 의한 토축산성(土築山城)으로, 현재는 거의 대부분이 붕괴되어 그 윤곽선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성내에는 약 8∼10m의 폭으로 내호(內壕)로 보이는 통로가 둘러져 있는데 이는 성벽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이 산성은 성두산 정상부에 축조한 북성(北城)과 남으로 뻗은 산 능선을 따라 축조된 남성(南城)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북성은 서북쪽의 모서리부분이 허물어져 있어 이곳에서 성의 축조상태를 살필 수가 있다. 성벽은 삭토하여 내부를 넓고 평평하게 하였으며, 동시에 외부를 가파르게 하였고 그 위에 판축(版築)을 하였다. 성의 동북부에 문터가 있고, 성 전체 둘레는 330m이다. 남성은 둘레 250m이고 이곳에서는 성 밑을 지나가는 도로와 갑천, 그리고 넓은 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좋은 곳이며, 문터는 북성과의 접합부에 2개가 있다. 이 산성이 위치하고 있는 유성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 불려져 내려온 땅이름으로서, 백제시대에는 노사지현(奴斯只縣)으로 알려져 있고, 이 구성동 산성을 노사지현의 치소(治所)로 추정하기도 한다. 21. 우술성 산성명칭 | 우술성(雨述城) | 둘레 | 580m | 수량/면적 | 15,074㎡ | 현존높이 | | 지정일/지정 | 1989.3.18 / 대전시기념물 제9호 | 건물지 | 북쪽 고대와 남쪽 저지대 | 시 대 | 삼국시대 백제 | 문지 | 2곳. 남문, 동문 | 주 소 | 대전광역시 대덕구 읍내동 산19-1 | 우물 | 없음 | 소 유 | 사유 | 기타시설 | 북쪽과 남쪽 양단의 토루 |
1>일반설명 우술성은 서쪽으로 갑천변이 조망되는 곳에 위치하며 돌과 흙을 섞어 쌓은 성이다. 해발 145m로 비교적 낮은 산에 위치하나 서벽 쪽의 갑천변 방향으로는 경사가 급하여 접근하기 힘든 자연 요새에 가깝다. 하지만 동쪽의 대전~신탄진간 국도에서 접근하면 거의 평지에 가까워 접근성이 매우 용이하다. 성 둘레는 약 580m 정도이며 평면은 삼각형 모양을 이루는데 북쪽의 꼭지점에 해당하는 지점이 가장 고지대이다. 동벽은 흙으로 언덕은 쌓은 토루의 형태로 바깥벽의 높이가 2.2m정도이며, 서북벽은 갑천변을 향하는데 성돌이 일부 노출돼 있는 상태이다. 남벽은 흙과 돌이 혼축된 형태이며 안쪽에서의 높이는 2.3m이고 바깥에서의 높이는 3.4m이다. 현재 이 성은 거의 붕괴되어 성내 구조물을 확인하기 어렵고 남문지와 남문지 앞쪽의 수구지 정도가 확인된다. 남문지의 문 폭은 3.6m이고 남문지에서 서쪽으로 10m 거리에 2m폭 정도의 수구지가 확인된다. 2>전문설명 이 산성은 갑천변에 신라군이 북서 방향에서의 접근을 방어 하기위해 축조된 토석혼축 퇴뫼식 산성이다. 동쪽에서의 접근은 평지에 가까울 정도로 용이하지만 동쪽의 계족 산성과 연계해서 적을 방어 할 수 있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성의 남쪽에 당산성이 위치하고 동쪽 3km 거리에 계족산성이 있다. 이 산성의 남쪽으로 회덕 당산성이 있고 서쪽으로는 갑천이 흐르며 동쪽으로 3km 거리에 계족산성이 위치하며, 이 산성에서 동남쪽 700m 거리에 조선시대의 회덕현과 관아 터가 남아 있다. 동남쪽 700m 거리에 조선시대의 회덕현 관아 터가 있다. 연축동 산성이라고도 불리며 이 산성은 백제시대 우술군의 치소라고 알려져 있다. 22. 성북동산성 산성명칭 | 성북동산성(城北洞山城) | 둘레 | 450m | 수량/면적 | 28,660㎡ | 현존높이 | 서벽 2m | 지정일/지정 | 1990.05.28 / 대전시기념물 제18호 | 건물지 | | 시 대 | 삼국시대 | 문지 | 2곳. 북문, 서문 | 주 소 | 대전 유성구 성북동 산20-5 | 우물 | 북문터 부근 1곳 추정 | 소 유 | 사유 | 기타시설 | |
1> 일반설명 성북동산성은 대전시 유성구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해발 230m의 성재고개 남쪽산 정상의 지세를 이용하여 쌓은 성이다. 산꼭대기를 빙둘러 쌓았으며, 둘레는 약 450m 정도이다. 문터는 동북벽에 산 정상으로 오를 수 있는 곳과 북벽 중앙으로 통하는 곳 2개가 있으며, 북문터와 가까운 곳에는 우물터가 있다. 동벽과 남벽은 원래의 지형을 깎아 만든 듯 하나 그 형태조차 파악하기 힘들며, 성안 곳곳에는 건물터의 흔적이 있고 격자무늬, 물결무늬 등을 새겨 넣은 토기와 기와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 산성은 규모와 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대전과 부여를 잇는 주요 교통로로 위치해 있으며, 대전 동부의 여러 산성들과도 서로 연결되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2> 전문설명 원내동에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남쪽 해발 230m의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의 형태는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성의 둘레는 약 450m 정도이나 성벽은 거의 붕괴되었고, 북벽의 일부가 남아 있다. 문터는 동북벽의 모서리에 위치하여 산 정상으로 오를 수 있는 곳과 북벽 중앙의 모서리에 위치하여 산 정상으로 오를 수 있는 곳과 북벽 중앙의 한 곳 등 2개소가 있다. 동벽과 남벽은 지형을 이용하여 삭토(削土) 수법으로 축조한 듯하나 그 형태조차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파괴되어 있다. 성안에는 곳곳에 건물터의 흔적이 있고, 북문터와 가까운 곳에 우물자리가 있다. 이 산성은 동쪽으로 대전 동부의 여러 산성들과 서로 연결되는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23. 안산동산성 산성명칭 | 안산동산성(案山洞山城) | 둘레 | 600-800m | 수량/면적 | 50,900㎡ | 현존높이 | 북벽 20단 3m | 지정일/지정 | 1990.05.28 / 대전시기념물 제16호 | 건물지 | 서쪽 평탄지 | 시 대 | 삼국시대 | 문지 | 3곳. 남문, 서문, 북문 | 주 소 | 대전 유성구 안산동 산40-42 | 우물 | 없음. | 소 유 | 사유 | 기타시설 | 창고터, 북벽 치 |
1> 일반설명 대전광역시 유성구 안산동과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사이에 있는 해발 226m의 고조산 정상에 쌓은 산성이다. 산봉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둘레는 약 600∼800m이며, 성벽 안쪽에 교통호가 일부 남아 있다. 지형을 따라서 쌓아 3층의 계단 모양으로 만들어 3중의 산성처럼 보이는데 백제 때 만들어진 산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다. 현재는 성벽이 조금 남아 있는데, 안쪽 성벽은 높이 1.1m, 바깥쪽 성벽은 높이 6.3m이다. 성안의 가운데에는 둥글게 쌓은 곳이 있는데 창고터로 여겨지며, 북쪽으로 통로가 나있다. 지리적으로 성에서 대전∼조치원간 도로가 잘 보이는 교통의 중심지여서 중요한 산성으로 여겨지며, 특히 인근의 적오산성, 구오산성과 서로 관계를 가진 군사 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전문설명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면 안산교(案山橋)가 있다. 이 다리의 왼쪽으로 위치한 해발 226m의 산정상에 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형태는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성 둘레는 약 600∼800m로서 지형을 이용하여 내탁외축(內托外築)하였으며, 성벽 안쪽에 교통호가 일부 남아 있다. 서벽의 일부에 성벽이 남아 있는데, 안쪽 성벽 높이 1.1m, 바깥 성벽높이 6.3m이다. 또한 성은 3층의 계단모양으로 쌓았는데, 지형에 따라 석축을 돌려 3중의 산성처럼 보인다. 성안의 중앙부에 둘레 100m, 지름 31.7m의 둥글게 쌓은 곳이 있다. 이 시설물은 창고터로 생각되며 북쪽으로 통로가 나 있다. 서문터는 상태가 양호하게 남아 있으며, 성문 폭은 4.9m이고, 성벽 높이는 5m이다. 산성의 서쪽에는 용수천이 흐르고 있으며, 성에서 대전-조치원 도로가 잘 보이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산성으로 생각된다. 24. 적오산성 산성명칭 | 적오산성(赤鰲山城) | 둘레 | 730m | 수량/면적 | 44,624㎡ | 현존높이 | 동벽 7.2m | 지정일/지정 | 1990.05.28 / 대전시기념물 제13호 | 건물지 | 3-4곳 추정 | 시 대 | 삼국시대 | 문지 | 4곳. 동서남북에 문지 | 주 소 | 대전 유성구 덕진동 산19-1외 3필지 | 우물 | 1개 | 소 유 | 사유 | 기타시설 | |
1> 일반설명 대전광역시 유성구에 있는 해발 255.1m의 적오산 정상에 만들어진 산성으로 덕진산성이라고 불리운다. 산의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정상을 둘러 쌓았으며, 마름모꼴의 모양으로 둘레는 730m이다. 성벽은 자연석을 가로 쌓기 하였으며, 바깥면을 자연스럽게 맞추어 그 안쪽으로는 같은 크기의 돌을 엇물려 쌓았고, 위로 올라갈수록 약간 경사를 이루게 하였다. 성은 정상을 중심으로 하여 능선을 따라 만들었는데 북단으로 연결된 곳에 북문터가 있다. 이곳에서 약 210m 지점에 서문터가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돌로 만든 우물이 있다. 성벽은 다시 동쪽으로 구부러져 동문터와 연결되고 있으며, 남벽은 안쪽 높이 1.5m∼2m, 바깥 높이 5m∼6m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와 토기조각들이 출토되어 성의 사용시기를 알 수 있다. 2> 전문설명 북대전 나들목 서쪽에 위치한 해발 255.1m의 적오산 정상에 축조된 석축산성으로 덕진산성(德津山城)이라고도 불리워진다. 성벽은 산의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테뫼식으로 쌓았고, 성벽은 거의 붕괴되었으나 윤곽은 뚜렷하다. 성의 평면형태는 마름모꼴이며 둘레는 730m 정도이다. 성은 해발 255m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하여 등고선을 따라 축조되어 등고선 230m의 북단(北端)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곳에 북문터가 있다. 이곳에서 성벽은 등고선 210m지점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서문터가 있고, 성벽은 다시 동쪽으로 구부러져 축조되어 동문터로 연결되고 있다. 남벽은 안쪽높이 1.5∼2m, 바깥높이 5∼6m가 남아 있다. 성벽은 자연석을 가로쌓기 하였으며, 바깥면을 자연스럽게 맞추어 그 안쪽으로는 같은 크기의 돌을 엇물려 쌓았다. 성벽의 아랫부분에서 위로 올라 갈수록 조금씩 뒤로 물려 쌓았는데 그 경사는 3∼5°정도이다. 전체적인 성벽의 축조방법은 남아 있는 상태를 짐작해 볼 때, 안쪽 높이 2m, 바깥높이 6∼7m정도의 협축(夾築)으로 쌓았다고 생각된다. 문터는 동·서·남·북에 각각 1개씩 4개소가 남아 있다. 또한 서문터에서 약 30m 떨어진 곳에 직경 1.2m의 돌로 만든 우물이 있다. 성안에는 4개의 건물터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곳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백제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의 것으로 이를 통하여 성의 사용 시기를 알 수 있다. 이 산성을 백제시대 소비포현(所比浦縣)의 치소(治所)로 보는 견해가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