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자료실

기운(양과 음) 이 센 장소와 경주 건천 여근곡

정도령1 2017. 4. 15. 10:21

      << 기운(양과 음)이 센 장소 >>

     여름을 맞아 전국 각지를 찾는 행락 인파가 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기도(祈禱)를 통해서, 또는 음식을 통해서 유난히 ‘기운(氣運)’을 많이 찾는데,

     올 여름에는 이런 곳을 찾아가 기운을 받아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양(陽)기운이 강한 곳과 음(陰)기운이 강한 곳이 어디일까요? 기운이 강한 곳에서는 기도와 무속(巫俗) 행위가 성행합니다.

     이것은 그런 기운을 받기 위해서 하는 행위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양기운이 넘치는 곳은 대부분 기도처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4대 기도처인 강원도 양양 오봉산 낙산사의 홍련암, 서해안 석모도 낙가산 보문사,  남해안의 경남 남해 금산 보리암과  전남 여수 금오산 향일암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해수관음 기도처

          바다를 마주보는 바위산 중턱의 해수관음 기도처와 산신 기도처

             이 네 곳의 공통점은 모두 바다를 마주보며 바위산 중턱 경관 좋은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도하기 안성맞춤인 장소이죠.

             한 번은 남해 금산 보리암 해수관음보살상 앞 삼층석탑에서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새벽에 일출을 보기 위해 갔는데, 동행한 문화해설사가 들고 온 나침반을 탑 옆에 놓자,  그순간 나침반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왔다갔다 하더군요.

             정말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바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자기장(磁氣場)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동양학자인 조용헌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처는 기본적으로 바위산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양기운이 센 곳이 적격입니다.

             그래서 보통 바위산 중턱에 많이 있습니다. 더 좋은 것은 바위의 기를 받는 기도를 하면서 물소리를 들으면 집중도를 더욱 높일 수 있습니다.

             파도소리가 마치 음향으로 치면 스테레오로 들리며 마음을 더욱 안정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4곳의 공통점은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 전통 신앙인 용왕기도에서 유래한 해수관음 기도처라는 사실입니다. 이 4대 기도처는 엄밀히 말하면 해수관음(海水觀音) 기도처입니다.

             해수관음 기도는 한민족 기도의 3대 원형(原型)인 산신기도, 용왕기도, 칠성기도 중의 하나인 용왕기도가 불교와 융합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흰옷을 입은 관세음보살이 바다에서 꿈틀거리는 커다란 용의 등에 올라타 서 있는 모습은 해수관음을 상징하는 대표적 그림입니다.

             이들 4곳에서는 비슷한 해수관음보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산신기도처도 양기운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설악산 봉정암, 대구 팔공산 갓바위,

             청도 운문사 자락 호거산 운문사 사리암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 외에 태백산, 마니산, 계룡산 등도 있습니다. 특히 설악산 봉정암은 ‘한국 산신의 메카’로 불립니다.

             봉정암은 설악산 기운의 정수(精髓)에 해당합니다. 산 전체가 엄청난 골산(骨山)에 바위덩어리로 되어 있으며, 그 중앙에 봉정암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맞은편에서 보면 가히 대단한 자기장이 형성된 기운 덩어리로 보입니다. 이름도 ‘봉황의 정수리’란 뜻에서 봉정(鳳頂)이라고 합니다.

 

                       남해 금산 보리암

               양기운이 넘쳐나는 이유에 대해 조용헌 박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바위는 거대한 기운의 덩어리입니다. 우리나라는 대부분 화강암 바위 덩어리로 된 산들입니다.

               단단한 바위일수록 기(氣)가 넘쳐흐릅니다. 또 영성(靈性)개발에 유리하며, 종교적 기도가 성행합니다. 다 기를 받기 위한 작업들입니다. 

               기독교 지도자들 상당 수도 산에서 기를 받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히말라야 자락의 강한 기운으로 달라이라마와 같은 큰 스님이 탄생한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유럽의 유명사상가나 철학자도  알프스의 강한 기운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 박사는 “자기 인생에 절벽이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봉정암에서 3일 밤낮을 죽기 살기로 기도를 한 번 해봐라”고 권합니다.

              “장담은 못해도 어느 정도 풀릴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해수관음 기도처이던, 산신기도처이던, 양기운이 넘쳐나는 곳에는 많은 기도객들이 몰립니다.  

              특히 수능이나 신년 일출 때에는 정말 발 디딜 틈조차 없지요. 한국인들의 지극 정성과 극성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대관령 국사성황당

             “정상인은 음기운 강한 곳 피해야”

                그러면 한국에 음기운이 넘치는 곳은 어디일까요? 보통 계곡 옆 서늘하거나 음습한 곳이 이에 해당합니다. 뭔가 나올 것 같은 기분 나쁜 곳입니다.

                그 뭔가는 귀신으로 통할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접신(接神) 장소로 꼽히는 곳입니다. 접신은 무속인들이 주로 합니다.

                즉 무속인들이 무속행위를 하는 곳이 음기운이 넘치는 장소로 보면 됩니다. 손꼽히는 장소가 대관령 국사성황당, 영양의 일월산, 계룡산, 지리산, 한라산 일부 입니다.

                계룡산은 계룡대가 들어서기 전에 전국의 무속인들의 집결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지금도 계룡산에서 간혹 무속인들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무속인들 사이에 음기운이 가장 강한 곳은, 즉 접신이 가장 잘 되는 곳은 대관령 국사성황당과 영양의 일월산 입니다.

               국사성황당은 신정절 하루 빼고 1년 내내 굿판을 벌이지 않는 날이 없다고 합니다. 위치를 가만히 살펴보면 꼭 여성의 음부에 해당하는 듯합니다.

               능선 사이에  위치해 있죠. 음부 부분에는 샘터가 있습니다.

 

                        팔공산 갓바위 기도객

                절묘한 위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월산도 태백산의 가랭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아예 음기가 강한 여산(女山)이라 불립니다.

               음력 그믐날만 되면 전국의 무속인들이 일월산으로 몰려들어 영험하고 신통한 내림굿을 한다고 합니다.

               무속인들 사이에서는 이곳에서 굿을 하고 나면 점괘가 신통하다 하여 성산(聖山)으로 추앙 받습니다.

               하지만 조용헌 박사는 “정상인은 음기운이 강한 곳은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고말합니다. 음기운은 기본적으로 정상인에게는 별로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음기운이 강한 곳에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디든 물이 넘쳐 납니다. 생명을 잉태할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음습한 기운을 좋아하는 산나물이 무성히 자랍니다. 산나물꾼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장소입니다.

               양기운이든 음기운이든 실제로 사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일부에서는 미신이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수천 년 동안 검증받은 성스런 행위,  즉 기도라고 말합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만 세상에는 흐르는 기운(氣運)이 분명 있어 보입니다.

               그 기운에 따라 사람과 조직, 사회, 국가의 운명이 흥(興)하기도 하고, 쇠(衰)하기도 합니다. 기운이 흥할 때 잘 다스리면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기운을 잘 아는 사람들이 많은 조직이나 사회는 당연히 흥하겠지요. 지금 우리나라는 기운이 넘쳐흐르는 국운상승기라고 합니다.

               이런 상승기가 계속 이어졌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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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산(여근곡) 소회!| 천주스님방(불교적 斷想)

천주(무원) | 조회 162 |추천 0 | 2011.11.14. 23:25

 여근곡 (女根谷 : 현지인의 지명으로는 보지산)

 

 경주시 건천읍 오봉산 아래에 여근곡(女根谷)이라는 작은 동산이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으로 가다가 경주터널을 지나기 앞서 직전에 왼쪽을 보면 보이는 산입니다.

 어릴 적 들은 현지 어른들 말을 떠 올려 보면, ‘여근곡’이라는 명칭보다는 ‘보지산’으로 불렸던 기억이 납니다.

 옛날, 한양에서 경주부에 부임하는 관리들은 보지산을 보면 재수가 없다하여, 일부러 이 산을 피해서 경주로 오고, 임기를 마치고 갈 때는

 한번 씩 둘러보고 갔다는 일화와 함께, 어느 해(일제 강점기) 보지산에 불이 난 이후로 마을이 거의 망하기 직전까지 갔는데,

 조림을 하고 난 뒤부터 다시 마을이 부흥하게 되었다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평소 건천에서 산내로 들어오는 국도변에 있는 ‘여근곡’ 안내 간판을 보면서 그냥 지나치기만 했다가 옛일이 생각나서

 다시 한 번 '여근곡'을 둘러보고 왔습니다. 


 여근(女根)은 여자의 음부(陰部)를 말하는 옥문(玉門) 즉, ‘보지’를 말합니다. 보지라고 하면 쌍스럽고 욕처럼 들리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보지, 자지라는 말은 순 우리말로써 그 어원을 딱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남자의 성기를 순 우리말로는 ‘자지’라 하고,

 여자의 성기를 ‘보지’라 하니 굳이 욕으로만 생각하는 게 오히려 더 민망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남자의 성기는 앉으면 감춰짐으로 해서 앉을 좌(坐), 감출 장(藏)을 써서 좌장지(坐藏之) - 자지,

 여자의 성기는 일어서서 걸으면 감춰진다 해서 걸음 보(步), 감출 장(藏)을 써서 보장지(步藏之) -보지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명과 또 다른 설명이 있기는 해도 무엇 하나 정의할 수는 없는 게 사실입니다.  

 

 여근곡에 대한 설화는 고려 말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 권1 '선덕여왕지기삼사(善德女王知幾三事) 편에 나오는 얘기가 바탕이 됩니다.


 지기삼사(知幾三事)

 삼국유사 선덕여왕 조에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가 수록되어 있는데, 지기삼사란 '기미나 조짐을 미리 안, 예견 한 세 가지 일'이란 뜻입니다. 


첫째, 당 태종의 모란꽃

 즉위년인 632년, 당 태종은 빨강, 자주, 하양색의 모란 그림과 그 씨앗을 선물로 보냈다. 왕은 이를 보고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씨앗을 심어보니 과연 그랬다.

 훗날 신하들이 이 일을 물어보니 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어 향기가 없음을 알았고. 이는 또한, 남편이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일연은 이 고사를 소개한 뒤, 당 태종이 신라에 세 여왕(선덕, 진덕, 진성)이 있을 것으로 짐작한 점도 함께 칭찬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일이 진평왕 말년에 벌어진 일로 묘사되어 있다.

 

 둘째, 여근곡(女根谷)의 백제군

 왕은 즉위 4년인 635년,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겨울날, 엄동설한에 영묘사(靈廟寺)에 있는 옥문지(玉門池)에서 개구리 떼가 삼사 일을 계속해서 울었다.

 백성들이 괴상히 여겨 여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이에, 왕은 급히 각간 알천(閼川), 필탄(弼呑)에게 병사 2천을 주어

 서라벌 서쪽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女根谷)을 공격하게 하였고, 또 신라군이 이길 것이라고도 했다.

 과연, 여근곡에는 백제 장수 우소(亏召)와 500여명의 백제군사가 매복해 있었는데, 알천과 필탄은 이를 쳐서 모두 죽였다.

 뒷날 신하들이 그 이유를 물었다. 왕은 이렇게 설명했다.

 "개구리는 노(怒)한 형상을 하고 있다. 이것은 병사(兵士)를 뜻하는 것이요, 옥문(玉門)이란 여성의 음부(陰部)를 상징하는데,

 빛깔로는 흰빛이고, 흰빛은 서방(西方)을 뜻한다. 그러므로 서쪽 여근곡(보지산)에 병란(兵亂)이 있음을 알았고

 또한, 남근은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어 나오는 법이니, 그래서 우리 군사가 쉽게 이길 수 있음을 알았다."라고 답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옥문지에서 개구리가 운 때가 즉위 5년인 636년 5월로 기록하고 있다. "

 

 셋째, 왕의 승하와 도리천(忉利天)

 왕이 아직 건강할 때에 신하들을 모아놓고  "짐이 모년 모월 모일에 죽을 것이니 도리천((忉利天)에 짐을 장사하라" 고 명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도리천((忉利天)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서 물었더니 왕은 낭산(狼山) 남쪽이라고만 일러 주었다.

 왕은 과연 자기가 예언한 날에 서거했고, 신하들은 왕을 낭산(狼山) 남쪽에 장사지냈다. 그런데, 그 후 10여 년 후에 문무대왕이  선덕여왕 능

 아래에 사천왕사를 세웠던 것이다. 불경에 '사천왕 위에 도리천이 있다' 했으니 사천왕사 위에 있는 여왕의 능은 곧 도리천이 되는 것이다.

 왕은 10여 년 후에 자기 능 아래에 사천왕사가 세워질 줄을 미리 알았던 것이다.

              - 출전 : <삼국유사> 권1 '선덕여왕지기삼사(善德女王知幾三事)'에서 간추림.

 

  보지산을 굳이 설명하려 글을 쓰는 게 아닙니다.

 

 경주에서 보면 거의 북서쪽에 있는 건천읍의 작은 동산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여근곡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배워왔고 학습되어 있으니 싸잡아 비판 없이 그렇게 믿고 있을 뿐.


 실제로 우리가 배운 식민사관에 의해 억지로 짜 맞추어 진 가짜 역사에 의한 경주는 결코, 신라 천년의 서울이었던 서라벌이 아닙니다.

 저의 그간의 소견으로는 시기가 분명하지 않은 어느 한 때, 대륙의 국제정세에 의해 대륙에서 밀려들어 온 신라계 사람들에 의해 세워 진,

 본국(本國) 신라의 분국(分國)인, 후대의 동 신라의 수도일 뿐입니다.

 고증할 길은 없지만, 신라 천년의 수도는 결단코 아닙니다.

 

 삼국유사의 원전을 사려 깊게 잘 살펴보면, 군데군데 타의에 의해 왜곡되어 문맥상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이 많음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선덕여왕은 여왕이 아닌 여황제 즉, 여제(女帝)였습니다.

 현재의 지나(중국) 땅 동남부에서 시작되어 계림(鷄林), 사로국(斯盧國), 서라벌(徐羅伐)로 불리던 신라는 황제국이었으며 따라서,

 선덕여왕 또한, 황제 즉, 여황제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마땅히 선덕여왕이 아닌, 선덕여제라고 부름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인평(仁平)이라는 연호(年号는 황제국에서만 쓰는 독자적인 것입니다.)를 썼으며, 분황사(芬皇寺)를 세웠는데, 분황사라는 절 이름에는

 선덕황제에 의해 지어졌기에 향기 분(芬), 임금 황(皇)을 써서 ‘황제의 향기가 나는 절’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선덕여제는 또한, 불교가 국교였던 그 시대에 요즘으로 치면 수행력과 신심이 아주 깊은 대보살이었습니다. 

 많은 불사(佛事)를 하고 황룡사의 9층목탑을 세웠으니 여자로서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불사를 한 여자로 어떤 여자도 선덕여제같은

 불사를 한 사람은 없기 때문인 까닭이며, 지기삼사의 예처럼 지혜로운 수행과를 드러 내 보인 까닭이기도 합니다.

 

 즉위하여 받은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호의 의미 또한, 성스러운 여자황제라는 뜻입니다.

 '皇姑'라는 호에 이미 여황제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때의 고(姑)는 ‘시어미’ 고(姑)라는 뜻보다는 부녀자를 높여 통칭하는 의미의 고(姑)이니,

 해석하면 황제는 황제인데 여황제라는 뜻입니다.

 

 지기삼사에서 "짐(朕)이 모년 모월 모일에 죽을 것이니 도리천((忉利天)에 짐을 장사하라"고 하는 대목 중에

 '짐(朕)'이라는 자칭어(自稱語)는 황제만이 쓰는 자칭어입니다.

 그런 여러 정황으로 봤을 때 선덕여왕은 왕이 아닌 여황제 즉, 여제(女帝)였습니다. 그리고 백제, 고구려는 물론이요, 신라 또한, 황제국이었습니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과거사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하는 사람들이 아마도 99% 일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가 바로 서지 않은 나라는 국가의 존속이 언제나 위태롭습니다. 마치, 지금의 대한민국처럼 말입니다.

 지금의 우리 대한민국은 비유하자면, 뼈대가 약한 살찐 우량아와도 흡사합니다. 거기에다 정체성도 없습니다.

 작은 시련에도 몸살을 앓게 되는 단지, 겉모양만 우량아 일 뿐입니다.

 

 19세기 후반부터 일제에 의해 지배되어 온 까닭이며, 광복 후에도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결정적인 잘못에 원인이 있기도 합니다.

 여전히 척결되지 못한 친일후손들이 기득권을 가지고 정계며, 재계를 장악하고 있으며, 그들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 보수라는 이름으로

 반보수의 기치만 드러나면 빨갱이로 몰아서 견제하며 지금까지 그렇게 교육시키고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독립 유공자 내지는 일제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지금껏 3대 째 어려운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일제의 강점기를 거친 많은 나라 중에

 대한민국을 제외 한 어떤 나라도 친일파를 척결하지 않은 나라, 그리고 친일파와 그 후손들을 기득권에 둔 나라는 한 군데도 없습니다.

 대한민국만 여전히 일제의 그늘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친일의 잔재들에 의한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학교에서 배운 역사(식민사관의 역사)대로라면 백제는 지금의 전라도 땅이니, 서라벌을 치려 숨어들었다면 백제 땅에서 오는 쪽인,

 경주의 서쪽이거나 더 은폐하기 좋은 깊은 산을 이용했을 텐데 수도 경주에 거의 인접한 건천 땅, 더구나 경주의 북서쪽에 있어

 침투경로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그것도 500명의 군사가 숨기에는 턱없이 작은 산을 삼국유사에 나오는 여근곡이라고 단정 지어

 마치 자랑스러운 유적지인양 소개되고 있음으로 인한 어이없음과 거기에 따른 더한, 분노가 느껴졌습니다.

 

 참고로, 우리가 어릴적 학교에서 필수과목으로 배웠던 국사는 정확히 말하면,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기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하여 착수한

 조선역사 왜곡과 말살을 골자로 하는 조선총독부 산하기관인 "조선사 편수회"가 정리 한, 철저히 일본인에 의해, 일본에 유리하게 지어 진,

 일본을 위한 역사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일본인이 쓴 한국의 고대사를 그대로 가감없이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은 왜 조선사 편찬을 조선총독부의 조선병합정책의 최 우선으로 삼았을까요?  

 그것은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함이자, 조선인을 무능하고 무력하게 만들어 그들의 식민지배를 항구적으로

 강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민족의 역사를 왜곡축소하여 일본의 역사 보다 하위에 두어야 만이 조선사람들의 민족성을 약화시킬 수 있음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역사 점령작업을 지금 서두르고 있을까요?

 그들은 지금의 중국대륙내의 모든 동이족(한민족) 관련 유적지와 사서를 철저히 훼손하고 감추며 바꿔치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구려나 발해의 역사부분은 그 뿌리 자체를 우리와 분리시키며 자기네 역사로 병합시키는데 주력하고 있으며,

 취재나 방문을 철저히 차단 하고 있습니다. 

 한민족의 주류라고 자처해야 할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 대한 아무런 국가적인 대책수립이 없습니다.

 역사를 모르는 나라와 민족은 뿌리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외교전에서 내세울 역사적 명분이 위축되고 쫄아들면서 스스로 자조의 한숨 만을 내쉴 수 밖에 없게 되며 점점 정체성을 잃어가게 됩니다. 

 위축된 역사관은 위축된 가치관을 갖게 하며, 위축된 가치관은 현대판 사대주의로 흘러, 대등한 국제관계나 외교에서 밀려

 언제나 끌려 다니는 외교를 펼 수 밖에 없게 합니다. 그런 까닭에 지금의 대한민국은 뼈대는 부실한 채, 겉모양만 살찐 우량아일 뿐입니다.


 보지산이 있는 뒷산 오봉산에 있는 ‘주사암’의 안내판(경주시에서 세운)을 보면 더 가관입니다.

 오봉산을 부산성(富山城)이라고 합니다. 

 식민사학을 바탕으로 하는 역사서대로라면, 부산성(富山城)은 수도 서라벌을 지키는 관문인데,

 어떻게 지극히 중요한 군사주둔지인 부산성 바로 코밑에 수도 서라벌을 공격하기 위한 백제 군사 500명이 숨어 들어 있을 수 있으며,

 또 500명이 숨어 있기에는 말도 안될만큼 턱없이 좁고 작은 공간을 여근곡이라 하는지 아무 물증적, 비판적 근거도 없이 단지,

 일제가 끼워 맞춘 대로 대락적으로 경주의 서쪽(서북)방면에 있는 산이니,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나오는 부산성(富山城)이라고 단정하고,

 절 이름도 또한, '붉은 모래가 있는 산에 있는 절'이라는 뜻의 ‘주사암(朱沙庵)’이라고 이름합니다. 그 산에는 붉은 모래가 어디에도 없습니다.

 주사(朱沙)란 흔히, 부적을 쓰거나 한방에서 쓰는 광물로 명경주사(明鏡朱沙)를 말합니다.

 그런 명경주사는 지금의 중국 땅에서도 특정지역에서만 생산되는 특수광물입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명경주사(明鏡朱沙)가 나는 지금의 중국 땅 어딘가에 진짜 주사암이 있거나 있었겠지요?

 마치, 천년고찰인 것처럼 억지를 쓴 느낌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제가 일시 기도하며 머물렀던 기억으로는 ‘주사암’은 정말, 너무도 좋은 기도도량임은 틀림없습니다.


 오늘 ‘보지산’을 둘러보며 새삼 느끼는 점은 한심한 우리네 역사며, 무식한 국민들의 의식에 대한 서글픔을 넘어 선 분노였습니다.

 대학을 나오고 학력이 높다고 유식한 게 아닙니다. 많이 배워도 정견(正見)을 갖지 못하면 무식한 것입니다.

 지혜가 없는 지식은 오히려 해악이 됩니다. 무서운 현실입니다.


 경주는 역사와 문화재의 보고(寶庫)임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경주는 결코, 신라 천년의 수도 서라벌은 아닙니다.

 

 우리 역사를 빨리 제대로 복원하는 길이야 말로 지금의 경주를 역사의 중심에 바로 세울 수 있는 길입니다.

 그때에 경주는 진정한 신라(후대의 동 신라)의 수도로 재탄생 될 것입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사실은 알고, 혹여 지나는 길이 있다면, 정말 보지같이 생긴 보지산을 한번 보고 가십시오.

 가짜 역사는 여전히 우리를 속이고 있지만, 보지산은 분명 여근곡이 아닌, 보지산으로 거기에 있으니까요.


 글을 마무리 하려다 보니, 어째 욕을 실컷 한 느낌이 듭니다.

 

 ‘보지산’ 사진을 펌해서 올립니다. 


                         오후 내내 ‘보지산’과 씨름하며

                           나른한 저녁 천 주  승 _()_

  

 

여근곡 사진입니다. 소개 글에 올라 온 사진이라 실물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사진은 아주 오래 전에 찍은 사진인 것 같습니다.

      

 주(註) : 선덕여왕(善德女王 ?~647, 재위:632~647)은 신라의 제27대 왕이며, 한국사에서의 최초의 여제(女帝)로

             성은 김(金), 휘는 덕만(德曼)이다. 진평왕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딸로, 태종무열왕의 큰 이모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서는 진평왕의 장녀로 기록되어 있고, 필사본《화랑세기》에서는 차녀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태어난 순서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녀를 새로운 임금으로 추대하여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호를 올렸다.

 선덕여왕은 재위 초반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구휼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으며, 첨성대를 건립하였다.

 불교 또한 널리 장려하여 분황사, 영묘사 등, 많은 절을 건립하고 불경을 연구하게 하여 불교의 일대 부흥을 가져왔다.

 특히 선덕여왕은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 80m의 거대한 탑으로

 이웃의 9적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기 위한 원력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김부식의 사론은 이와 사뭇 다르다. 그는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라며 왕의 치세를 혹평하였다.


 즉위년인 632년에 을제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케 하고, 각지에 관리를 파견하여 홀아비, 홀어미, 고아, 독거노인 등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게 하였고, 633년 정월에는 스스로 신궁에 제사를 올렸으며, 여러 주·군의 조세를 1년 간 감해 주었다.

 이듬해에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를 완성하였고, 635년 겨울에는 이찬 수품(水品)과 용수(龍樹)를 보내어

 각지의 민심을 위로하였으며, 당나라와의 관계도 강화하였다.

 재위 마지막 해인 647년 정월, 상대등 비담이 염종(廉宗)과 함께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유신을 파견하여 비담을 상대하게 하였지만,

 반란 와중인 정월 8일에 여왕은 승하하였다. 시호를 ‘선덕(善德)’이라 하였고, 지기삼사에 예언한 것처럼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건천 여근곡 (보지산)| ♡-등산 안내방

민 초 | 조회 99 |추천 0 | 2016.11.27. 09:55


      보지산 [보오′산] ? 여근곡(女根谷). 경주시 건천읍 신평리 오봉산 동편에 있는 땅이름.

                                     ? 선덕여왕의 지기삼사와 김유신 장군에 얽힌 전설이 서려 있는 곳임. 금기어임. ≒소산.

¶경주° 부윤이 도임할 직에[찌′게] 보지산° 보머 재수 없다고, 시티재° 쪽으로 가지 일로로느 앤 지내간다.

         <경주 부윤이 도임할 적에 소산을/여근곡(女根谷)을 보면 재수가 없다고, 시티재 쪽으로 가지 이리로는 지나가지 않는다>.

¶오갱이° 돋을양달°이 보지산°캉 마지보고 잇다 아니가[아˜이′˜가].<오관골 돋을양지가 보지산과/여근곡과 마주보고 있잖아>.

¶아재요, 보지산° 밑에감자밭은 언제 매로 갈 긴기요[낑기요]?<아저씨, 여근곡(女根谷) 밑의 감자밭은 언제 매러 갈 것입니까>?

¶셉들° 보지산°에는 시목이 꽉 우거진 따문에, 누가 드가구 접어도 몬 드간다.

          <섶들 보지산[女根谷]에는 시목이 꽉 우거진 때문에, 누가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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